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전개 === 1986년 5월 21일 갓 학출이 되어 [[부천시]] 지역의 노동 운동에 뛰어든 [[권인숙]]이라는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4학년 때 제적되어 [[경기도]] 부천시에 소재한 (주)성신이란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란 가명으로 위장 취업했는데 위장 취업에 대한 동기를 1989년 9월 11일자 《전북대신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대학에 들어와 나는 2가지의 큰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먼저 데모 광경이었다. 학생들이 모여 노래하고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난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구경하기도 무서운데 저렇게 뛰쳐나가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는 것들과, 학우들이 끌려감에도 잔디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학우들의 태연함 또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꿈과 낭만의 최고봉으로 꿈꾸어 오던 대학이 점차 황량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공연 [[동아리]]에 들었다. 이 동아리 활동이 그 동안의 이기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게끔 한 것 같다. > >"인생에 있어서 꼭 한 번쯤 경험함에 있어서 어느 것 이상으로 가치 있고 보람 있다."는 친구의 권유로 [[농민학생연대활동|농활]]에 참가했다. 농활 속에서 나의 맘에 가장 와닿는 것은 3시간에 걸친 선배들의 의식화 학습이 아니었고, 노동의 힘듦과 농민들의 열심히 살아가려는 건실함, 순박함, 착함이었다. 이러한 모습들이 나에게 당연한 의문을 주었다. '자식 교육시키느라 천 원 한 장 쓰는 것도 너무 아까워하는 농민들의 검소하고 근면한 삶이 왜 궁핍하고 어려운 삶이어야 하는가?'하는 것들이었다. > >결국 농활을 통해 나 이외의 나와 같이 살아나가는 공동체의 '남'이 있구나 하는 것과,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됐다. '이제까지의 나의 삶이 진정으로 노동해서, 노력해서 얻은 삶인가?'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는 살지 않겠다.'는 생각에 운동권에 뛰어들었다. > >전북대신문 1989년 9월 11일자 5면. <권인숙 씨 초청 강연 초록 - 나의 삶, 나의 투쟁> 인천 5.3 민주항쟁으로 인해 탄압이 격렬해지던 1986년 6월 4일 밤 권인숙은 그녀의 정체를 의심한 통장의 신고로 자취하던 아파트에서 검거되었다. 조사 도중 권인숙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사실이 드러났고 당시 수배 중이었던 양승조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 위원장을 비롯한 고위 지도층의 소재도 추궁받았다. 권인숙은 5일까지 수사를 받았고 6일 새벽에 경찰서 상황실로 다시 끌려나갔다. 그녀가 자백하지 않자 옥봉환 당시 서장이 분노했고 당시 수사과 조사계 소속 형사였던 문귀동 경장에게 수사를 지시하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 [[http://www.joongang.co.kr/article/2261251|「문귀동」판결문 요지 (중앙일보)]],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880301000225|부산일보 기사]] 이렇게 끌려 온 그녀는 문 경장에게 6월 6일과 7일 2차례에 걸쳐 4층 조사실[* 2018년 <민중언론 참세상> 기사에 따르면 부천소사경찰서 4층은 정보과가 [[http://m.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3012&page=49&category2=1|쓰고 있다고 한다]].]에서 성고문을 당했다. 자세한 사건의 전개는 위 링크와 [[대한변호사협회]] <[[https://www.koreanbar.or.kr/pages/board/view.asp?teamcode=&category=&page=1&seq=5225&types=120&searchtype=&searchstr=|1986년 인권보고서]]>, 권인숙 수기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insiteschStr=&schQuery=&mainSrchField=1&kwd=%ED%95%98%EB%82%98%EC%9D%98+%EB%B2%BD%EC%9D%84+%EB%84%98%EC%96%B4%EC%84%9C#viewKey=CNTS-00076749840&viewType=C&category=%EB%8F%84%EC%84%9C&pageIdx=1&jourId=|하나의 벽을 넘어서]]>, 김정남 저 <진실 광장에 서다> p.535~538, [[박원순]] 저 <고문의 한국현대사 야만시대의 기록> 3권을 참고할 것. 때로는 현실은 상상보다 더 잔인하다는 점, 그리고 출판물에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 판단해도[* '''문귀동이 피해자에게 가한 행위는 대한민국의 현행법상 [[강제추행]]죄 구성요건을 정확히 충족시켰다.''' 해당 판례와 통설은 남성기와 여성기가 접촉하는 정도로는 [[강간]]이 성립되지 않고, 남자 성기가 여자 성기에 완전히 함몰하는 순간 [[강간죄]]의 기수에 이른다고 본다. 즉 간음행위 혹은 성교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본 사안에서 강간죄는 성립되지 아니한다.] 된다는 점만 언급한다. [[http://books.google.com/books?id=Blndtyy0cOIC&pg=PA537&lpg=PA537&dq=%EC%A7%84%EC%8B%A4%EC%9D%98+%EA%B4%91%EC%9E%A5%EC%97%90+%EC%84%9C%EB%8B%A4+%EA%B6%8C%EC%9D%B8%EC%88%99&source=bl&ots=mzj2P2pHG6&sig=wrtManqEt9G57qlI0BIc1qbPuFk&hl=en&ei=1v7YTt7zFIXJmQW5pJj9Cw&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1&ved=0CB8Q6AEwAA#v=onepage&q&f=false|#]] 6월 16일부터 인천소년교도소[* 현 인천구치소, 경북 김천소년교도소.]로 이감된 권인숙은 처음에는 자살 충동도 일었지만 곧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맞서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고문 소식이 알려지면서 [[교도소]] 내 양심수들이 연대 단식을 했고 그녀도 몸을 추스린 후 6월 28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이어 그녀는 7월 3일부터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면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날 권인숙은 공문서변조 및 동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행사, 절도, 문서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 가해자인 문귀동은 권인숙을 명예훼손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발했다. 그녀의 변호인단 9명이 7월 5일에 문귀동 경장과 옥봉환 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상대로 독직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하고 문귀동 경장이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면서 사건이 널리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